나는 정당하고 너는 아니다… 맥락부재의 사회
사람은 대체로 자신이 정당하다고 믿는다. 나 역시 그렇다. 내가 어떤 말을 했을 때는 그 말을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고, 어떤 선택을 했을 때는 그 선택에 이르게 된 사정이 있다. 내가 기억하는 나의 행동에는 언제나 앞뒤가 있고, 과정이 있으며, 감당해야 했던 현실이 있다. 그래서 나는 나를 쉽게 이해하고, 때로는 쉽게 용서한다.
문제는 내가 알고 있는 나의 맥락을 지나치게 크게 평가한다는 데 있다. 나는 내가 견뎌온 시간과 고민을 모두 알고 있다. 하지만 타인의 고민과 두려움, 그가 감당했던 조건은 대부분 알지 못한다. 그런데도 우리는 내가 가진 정보만으로 상대를 평가한다. 나에게는 사정이 있지만, 상대에게는 변명만 있다고 생각한다.
결국 “나는 정당하고 너는 아니다”라는 판단은 맥락의 차이에서 시작된다. 내 행동은 과정으로 이해하면서 상대의 행동은 결과만 보고 단죄한다. 내가 목소리를 높인 것은 절박함 때문이고, 상대가 목소리를 높인 것은 욕심 때문이라고 여긴다. 내가 침묵한 것은 전략이지만, 상대가 침묵한 것은 비겁함이라고 판단한다.
우리는 누구나 이유를 가지고 산다. 그러나 그 이유가 언제나 옳음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더 위험한 것은 자신의 이유를 정의로 포장하고, 그 정의를 타인에게 강제하려는 마음이다. 내가 옳다고 믿는 순간, 상대의 정당성은 쉽게 사라진다. 이런 마음들이 쌓여 지금의 내로남불을 만들었다. 내 편의 모순에는 맥락을 붙이고, 상대편의 모순에서는 맥락을 지운다.
김어준과 유시민을 수십 년 동안 보고 그들의 말과 행동을 경험해온 입장에서, 요즘 벌어지는 촉법들의 아웅다웅이 때로는 치기처럼 보이기도 한다. 오늘 처음 정의를 발견한 사람처럼 소리치고, 어제의 상황은 없었던 것처럼 누군가를 심판한다. 정치적 경험은 짧을 수 있지만 확신은 지나치게 크다. 맥락보다 태도가 앞서고, 책임보다 볼륨이 먼저 커진다.
그렇다고 오래 보아온 사람의 판단이 언제나 옳다는 뜻은 아니다. 오래된 경험 역시 또 하나의 과대평가된 맥락이 될 수 있다. 다만 최소한 누가 언제 위험을 감수했고, 누가 안전한 자리에서 뒤늦게 정의를 말하기 시작했는지는 구분할 필요가 있다. 2년 전 윤석열과 김건희를 상대로 자신의 자리와 평판, 생업과 미래까지 걸어본 사람이 지금 볼륨을 높이는 사람들 중 과연 몇이나 되는지 나는 묻고 싶다.
정당성은 목소리의 크기로 증명되지 않는다. 자신이 치른 대가와 감당한 책임, 그리고 타인의 맥락을 얼마나 인정할 수 있는지에 의해 드러난다. 내가 정당하다고 생각하는 순간일수록, 상대에게도 내가 모르는 이유가 있을 수 있음을 돌아봐야 한다. 맥락이 사라진 정의는 쉽게 폭력이 된다. 어쩌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큰 확신이 아니라, 내가 모르는 맥락 앞에서 한 번쯤 판단을 멈추는 태도인지도 모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