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g Archive for: 강릉

쇼핑몰의 시대에서, AI가 선택하는 시대까지

30년 전 커머스의 디지털 전환은 ‘쇼핑몰의 등장’으로 설명할 수 있다. 오프라인 매장이 온라인으로 옮겨왔고, 검색창에 키워드를 입력하면 수많은 쇼핑몰 링크가 결과로 나열되었다. 쇼핑몰의 링크가 검색 결과로서 순서대로 제시되는 구조였다. 누가 더 상단에 노출되느냐, 누가 더 많은 광고비를 쓰느냐가 곧 매출과 직결되던 시대였다. 이 시기의 경쟁은 ‘어디에 입점했는가’와 ‘얼마나 잘 보이느냐’의 싸움이었다.

지금 AI 시대의 커머스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사용자는 더 이상 상품을 직접 비교하지 않는다. “조카 졸업 선물로 20만 원대, 성향은 조용한 편”처럼 상황을 말하면, AI가 제품을 고르고 결제와 배송까지 이어준다. 검색 결과를 훑는 과정이 사라지고, AI가 브랜드를 ‘호출’하는 구조로 바뀌고 있다. 이 변화의 핵심은 링크가 아니라 신뢰다. AI는 무작위로 상품을 추천하지 않는다. 브랜드의 데이터, 리뷰, 재구매 흐름, 고객 반응을 종합해 ‘추천할 만한가’를 판단한다.

이 전환을 가능하게 만드는 기반에는 표준 프로토콜이 있다. 과거의 크롤링이 사람의 눈을 대신해 웹을 긁어오는 방식이었다면, 이제는 머신과 머신이 API로 직접 통신한다. 재고, 가격, 배송, 리뷰가 실시간으로 연결된다. 이 환경에서는 단순히 예쁜 쇼핑몰을 만드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AI가 이해하고 신뢰할 수 있는 구조를 갖추지 않으면, 아예 선택지에 오르지 못한다.

그래서 지금 기업과 브랜드가 준비해야 할 것은 두 가지다. 하나는 AI 검색 환경에서 불리는 존재가 되는 것, 즉 GEO 대응이다. 다른 하나는 프로토콜 기반으로 정확한 데이터를 제공하는 구조다. 나아가 브랜드 스스로를 대표하는 ‘브랜드 에이전트’를 준비하는 것도 중요한 화두가 되고 있다. AI가 고객을 대신해 쇼핑하는 시대에는, 브랜드도 AI와 대화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30년 전 디지털 전환이 ‘쇼핑몰을 만드는 일’이었다면, 지금의 AI 전환은 ‘AI가 신뢰할 수 있는 브랜드로 정리되는 과정’에 가깝다. 클릭을 유도하던 시대에서, 호출되는 시대로. 커머스의 무게중심은 분명히 이동하고 있다.

이커머스 AI 관련 핵심 용어 정리 (20)

  1. GEO (Generative Engine Optimization)
    AI 검색 엔진(챗GPT, 제미나이 등)에서 브랜드가 추천되도록 최적화하는 것

  2. UCP (Unified Commerce Protocol)
    구글이 주도하는 커머스 표준 규격. 제품 정보, 재고, 리뷰 등을 통합 관리함

  3. ACP (Agentic Commerce Protocol)
    오픈AI가 주도하는 커머스 표준 규격. 특히 결제와 액션 단계에 집중함

  4. Agentic Commerce
    AI 에이전트가 구매 결정, 결제, 배송 등 쇼핑의 전 과정을 자율적으로 수행함

  5. API (Application Programming Interface)
    머신끼리 데이터를 주고받기 위한 통로. 프로토콜 시대의 핵심 통신 수단

  6. Protocol
    머신 간의 통신을 위해 정해진 약속이나 표준 언어

  7. Dynamic Pricing
    상황, 수요, 고객 조건에 따라 실시간으로 가격이 변동되는 시스템

  8. Hyper-Personalization
    고객의 취향, 위치, 예산 등을 분석하여 제공하는 초개인화된 추천 서비스

  9. D2C (Direct to Consumer)
    유통 단계를 거치지 않고 브랜드가 고객과 직접 만나 판매하는 방식

  10. Brand Agent
    브랜드가 직접 운영하며 자사 제품을 최적으로 추천해 주는 AI 비서

  11. Friction
    쇼핑 과정에서 발생하는 갈등이나 불편함. AI는 이를 완화하는 역할을 함

  12. Gateway
    사용자가 쇼핑이나 정보를 접하기 위해 처음 통과하는 문 (현재는 AI가 그 역할)

  13. Multi-Modal
    텍스트뿐만 아니라 이미지, 음성 등 다양한 형태의 정보를 처리하는 방식

  14. Crawling
    봇이 웹페이지를 돌아다니며 텍스트와 이미지를 긁어모으는 기존 정보 수집 방식

  15. Social Proof
    소셜 미디어나 커뮤니티의 리뷰 등 대중의 반응을 통해 얻는 신뢰의 증거

  16. CEP (Category Entry Point)
    소비자가 특정 제품군을 찾게 되는 구체적인 상황이나 시점

  17. Tipping Factor
    소비자가 여러 제품 중 최종 결정을 내리게 만드는 핵심적인 정보나 요인

  18. CRM (Customer Relationship Management)
    고객과의 관계를 관리하는 시스템. AI 에이전트가 이를 고도화함

  19. AX (AI Transformation)
    기업의 비즈니스 구조를 AI 중심으로 전환하는 디지털 전환의 다음 단계

  20. Zero-click
    검색 결과에서 링크를 클릭하지 않고 AI의 답변만으로 쇼핑이 종결되는 현상

감자탕로그 2편. 장모님 국물에서 배운 것

하얀 국물의 시작은 기억이었다

하얀 국물 감자탕의 첫 아이디어는 내 머리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아내의 기억에서 시작됐다. 어릴 적, 엄마가 자주 끓여주던 하얀 국물 이야기를 들려줬다. 맛있는 고기가 듬뿍 들어간 국물이었고, 네 남매가 함께 먹던 음식이었다고 했다. 자극적이지 않았지만 깊었고, 잡내 없이 고기도 부드러워서 막내까지 잘 먹었다는 이야기였다.

그 이야기가 마음에 남았다. 정확한 레시피보다 “아이들이 잘 먹었다”는 말이 오래 맴돌았다. 그래서 딸에게도 한 번 먹여보고 싶어 장모님께 물었다. 그 국물의 정체는 특별한 양념이 아니라, 양념을 하지 않은 하얀 국물 감자탕이었다.

집밥에서 확인한 기준

장모님께 부탁해 한 솥 끓여 함께 먹었다. 신선한 강릉 돼지 사골과 목뼈를 푹 고아낸 국물이었다. 마침 아이의 이유식 시기와 맞물려, 그 국물에 뼈고기를 잘게 찢어 먹였는데 아이가 정말 잘 먹었다. 그 모습을 보며 확신이 생겼다. 이건 단순히 ‘순한 음식’이 아니라, 기준이 분명한 음식이라는 생각이었다.

이탈리안 오너셰프로 일하며 나는 늘 재료가 가진 맛을 해치지 않는 방향을 고민해왔다. 소스와 조미료를 덜 쓰고, 맛을 더하기보다는 남기는 쪽을 선택해왔다. 장모님의 국물을 보며 그동안 내가 중요하게 여겨왔던 생각들이 자연스럽게 겹쳐졌다. 기술을 뽐내는 요리가 아니라, 무엇을 지켜야 하는지를 아는 태도 같은 것들. 그 국물은 맛있는 경험이었고, 동시에 지금까지도 내가 붙들고 가고 있는 좋은 기준을 다시 확인하게 해주었다.

기준은 그대로, 선택지는 넓게

하얀 국물은 아이에게 먼저 맞춰진 음식이었지만, 어른의 식사로도 충분히 성립해야 했다. 그래서 국물은 그대로 두고, 원하면 칼칼하게 즐길 수 있도록 별도의 다데기를 곁들이는 방식이 자연스럽게 더해졌다. 국물을 바꾸지 않으면서도 가족 모두가 같은 식탁에 앉을 수 있는 구조였다.

그때 분명해졌다. 장모님의 국물은 레시피를 알려준 것이 아니라, 기준을 알려주었다는 것을. 자극 없이도 충분히 맛있을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아이부터 어른까지 함께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있다는 사실을 몸으로 보여주었다.

결정을 밀어준 장면

강릉으로 이사 온 뒤, 솔직히 걱정이 많았다. 다시 식당을 해야 할지, 아니면 중앙시장에서 김밥이라도 팔아야 할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그런데 아이가 하얀 국물을 먹는 모습을 보며 생각이 정리됐다. 이 음식을 만들어 팔아보자. 그것도 오프라인이 아니라, 처음부터 온라인으로.

해본 적 없는 방식이었고 두려움도 컸다. 하지만 우리 아이와 조카들이 잘 먹는 모습, 그리고 강릉에는 믿을 만한 로컬 식재료가 많다는 사실이 그 결정을 떠받쳤다. 겁은 있었지만, 기준은 분명했다.

마무리하며

장모님의 국물은 내게 방법을 알려주지 않았다. 대신 판단의 기준을 남겨주었다. 무엇을 더할 것인가보다, 무엇을 지킬 것인가를 먼저 생각하게 했다. 이 기준이 이후 하얀 국물 감자탕을 상품으로 옮기는 과정의 중심이 되었다.

왜 이 음식을 만들기로 결심했는지, 그 이유는 거창하지 않았다. 아이가 잘 먹었고, 어른도 함께 먹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시작에는 늘 집밥이 있었다. 다음 기록에서는 이 기준을 처음으로 사람들에게 먹여보며, 어떤 말들이 남았는지를 이어서 정리해보려 한다.

기준이 생기자, 자동화는 늦춰도 된다는 걸 알았다

사업 자동화와 가치 증명에 대한 기록

처음 1인기업을 생각했을 때, 나는 자동화에 꽤 집착했다. 사람을 뽑지 않고도 굴러가는 구조, 버튼 몇 개로 일이 돌아가는 시스템. Make.com, GPT, 각종 툴을 보면서 “이 정도면 AIG 비슷하게 흉내는 낼 수 있지 않을까”라는 막연한 기대도 있었다. 지금 돌아보면, 그건 자동화를 하고 싶었던 게 아니라 불안을 줄이고 싶었던 것에 가까웠다. 혼자 일하는 구조에서 가장 무서운 건 일이 끊기는 순간이니까.

그런데 지난 2~3개월 동안 실제로 일을 해보면서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자동화라는 이름으로, 아직 내가 직접 겪고 판단해야 할 일들까지 시스템에 넘기고 있었던 건 아닐까 하는 반성이 들었다.

첨부했던 문서에 이런 문장이 있었다. 시스템형 회사에서는 증분 이익에 6배의 배수가 적용된다는 말. 처음엔 솔직히 이해가 안 됐다. “이익은 이익이지, 왜 갑자기 6배를 곱하지?”라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건 회계의 언어가 아니라 기업가치의 언어였다. 내가 더 열심히 해서 번 돈은 소득이고, 구조가 바뀌어서 매년 반복될 돈은 자산이라는 차이. 자영업형 사업에서 늘어난 이익은 대표 개인의 노동 증가일 뿐이지만, 시스템형 사업에서의 이익은 ‘앞으로도 반복될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로 몇 년 치를 묶어 평가받는다. 그게 배수, 멀티플이다.

이제야 문서에 적힌 말이 이해됐다. 자동화의 목적은 편해지는 게 아니라, 이익이 반복 가능하다는 증거를 만드는 것이라는 걸.

그래서 KPI를 다시 보게 됐다. 예전엔 KPI라는 말이 부담스러웠다. 관리받는 느낌, 목표 숫자 같은 인상이 강했다. 그런데 지금은 이렇게 생각한다. KPI는 목표가 아니라 계기판이다. 내가 열심히 하고 있는지가 아니라, 이 사업이 살아 움직이고 있는지를 확인하는 숫자다. 오늘도 상담이 끊기지 않았는지, 제안 이후 다음 행동이 정리돼 있는지, 내가 빠져도 흐름이 멈추지 않는지. 이런 것들이 더 중요해졌다.

자동화보다 먼저 필요했던 건 기준이었다. 어떤 일은 사람이 해야 하고, 어떤 일은 반복만 되면 되고, 어떤 판단은 아직 내가 직접 해야 한다는 구분. 이게 되지 않은 상태에서의 자동화는 속도를 내는 게 아니라 방향을 잃는 지름길이었다. 요즘 내가 하는 일은 화려하지 않다. 문서 정리하고, 흐름 나누고, 기준을 남긴다. 하지만 이게 쌓이면 자동화는 결과로 따라올 거라는 확신이 생겼다.

이 글은 자동화 성공담이 아니다. 아직도 나는 직접 연락하고, 직접 판단하고, 직접 고친다. 다만 예전과 다른 건 하나다. 이제는 이 일이 자산이 되는가라는 질문을 계속 던진다. 버는 돈보다 남는 구조가 있는지를 보게 됐다. 이 변화가, 어쩌면 지금 내가 만들고 있는 감자탕 사업의 가장 큰 자동화일지도 모르겠다.

참고 정리: 알렉스 호르모지의 사업 자동화 프레임

  1. 개요
    본 보고서는 알렉스 호르모지(Alex Hormozi)가 제시한 ‘나 없이도 돌아가는 비즈니스’를 구축하기 위한 5단계 시스템과 사업의 진정한 가치를 평가하는 기준을 상세히 분석한다. 진짜 비즈니스는 소유자가 일에 매여 있는 것이 아니라, 소유자 없이도 스스로 수익을 창출하고 성장해야 한다는 철학을 바탕으로 한다.

  2. 사업의 진짜 가치: 현금 흐름 vs 자산 가치
    매출 130억, 순이익 26억으로 동일한 두 회사의 예시를 통해 사업 가치의 차이를 설명한다.

구분

첫 번째 회사 (자영업형)

두 번째 회사 (시스템형)

운영 방식

대표가 주 80시간 일하며 모든 업무에 직접 관여

대표의 관여 없이 주식 소유 형태로 운영

개인 수익

세금 50% 공제 후 약 13억 수령

기업 가치로 평가되어 자산화

증분 이익의 가치

6.5억 추가 이익 발생 시 약 3.25억 저축 효과

6.5억 추가 이익 발생 시 약 39억 자산 가치 상승

최종 평가

단순 소득 증대 모델

156억~195억 가치의 자산 모델

  1. 사업 자동화 5단계 시스템

1단계: 업무 목록화 및 시간 연구
자신이 하는 업무를 15분 단위로 기록한다. 엑셀에 수행 업무를 한 단어로 적고, 초록(위임 가능), 노랑(프로세스 필요), 빨강(채용 필요)으로 분류한다.

2단계: 의사 결정 트리 및 KPI 구축
업무를 넘기는 수준을 넘어 직원이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을 만든다. 상황별 가이드와 성과 지표를 통해 행동과 결과를 연결한다.

3단계: 레버리지와 3단계 훈련법
섀도우 트레이닝, 감독 하 실행, 독립 지원의 3단계를 통해 오너의 시간을 점진적으로 줄인다. 초기 실력보다 학습 속도를 중시한다.

4단계: A급 인재 및 관리자 채용
사장보다 뛰어난 전문가를 채용한다. 측정 가능한 지표를 질문하는 사람이 진짜 전문가다. 충분한 면접을 통해 패턴 인식을 만든다.

5단계: 마케팅 시스템에서의 오너 분리
오너의 얼굴 없이도 작동하는 7가지 마케팅 소스를 구축한다. 고객 후기, 라이프 사이클 광고, 감정이 담긴 결정적 순간을 활용한다.

  1. 최종 점검 및 결론
    3개월 부재 테스트를 통과해야 진짜 자동화다. 첫 사업이 오너 없이 돌아가지 않는 상태에서의 확장은 리스크만 키운다. 오너가 덜 중요해질수록 비즈니스 가치는 커진다. 진짜 자산은 당신 없이도 성장하는 사업이다.

네이티브 디지털, 네이티브 AI 세대들…

아무리 문법 이론을 공부하고, 유명한 강사에게 발음을 배우고, 각종 자격증을 따도 내 영어 발음과 사고는 끝내 네이티브 미국 사람처럼 되지 않았다. 단어를 더 많이 외우고 표현을 더 익힐수록 나아지긴 했지만, 사고의 속도와 뉘앙스, 그 자연스러움까지는 따라갈 수 없다는 걸 어느 순간 인정하게 됐다. 배움의 문제가 아니라, 출발선의 문제라는 걸 뒤늦게 알았다.

70년대에 태어난 나는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넘어가는 한가운데를 통과한 세대다. 집 전화에서 삐삐로, 삐삐에서 휴대폰으로, 다시 스마트폰으로 넘어오는 모든 과정을 직접 봐왔다. 컴퓨터의 시초라 불리는 에니악 이야기도 알고, 애플 II로 처음 키보드를 두드리며 디지털 세계에 발을 들였다. 하지만 태어나면서부터 구글 검색을 하고, 손에 스마트폰을 쥐고 자란 아이들과는 결국 속도도, 감각도 같아질 수 없었다. 디지털을 배운 세대와 디지털 안에서 태어난 세대의 차이는 생각보다 훨씬 컸다.

AI 시대도 다르지 않을 것 같다. 지금 우리는 새로운 기술을 ‘학습’하고 ‘도입’하고 ‘적응’하고 있지만, 곧 태어나거나 이제 막 자라는 아이들은 AI를 이미 존재하는 환경으로 받아들이며 자라게 될 것이다. 이 격차는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차이보다 훨씬 더 클지도 모른다. 하루에 몇 시간을 AI 공부에 쏟고, 사업에 적용하며 나름대로 앞서간다고 해도, 내 아이들은 전혀 다른 개념과 감각으로 진짜 AI 네이티브가 될 것이다.

그래도 오늘의 나는 하얀감자탕 1인기업 김사장으로서 할 수 있는 노력을 다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건 단순히 생계를 위한 일이 아니다. 나와 가족을 지키는 일이자, 10년, 20년 뒤 아이들이 살아갈 세상을 준비하는 아빠로서의 책임에 가깝다. 내가 이 변화를 외면하지 않고 끝까지 따라가 보려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아직 아무도 정답을 모르는 길이다. 어디까지 데려다 줄 수 있을지는 솔직히 자신할 수 없다. 하지만 적어도 우리 두 딸이 스스로 날아오를 수 있는 지점, 필요한 곳까지는 함께 가줘야 하지 않을까. 그게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아빠의 역할이라고, 나는 믿고 있다.

부가세 신고 1시간 컷, 엉엉엉 AI님 저를 가지세요. ㅠㅠ

정말 어이가 없었다. 부가세 자료 수집부터 신고까지, 1시간도 안 걸렸다. 그것도 방금 검색해서 알게 된 앱 하나로 말이다.

사실 나는 꽤 오래전부터 세무기장비를 아껴보겠다고 세무 앱으로 셀프 신고를 해왔다. 거의 10년은 된 것 같다. 앱을 써도 세법은 늘 어렵고, 인터페이스는 왜인지 항상 윈도우에만 최적화돼 있었다. 신고 기간만 되면 며칠 전부터 마음이 무거워지고, 당일에는 마감 시간까지 온갖 짜증을 참고 견디는 게 연례행사였다.

그런데 오늘은 그 짜증을 못 참고 말았다. “이 정도면 인공지능으로 해주는 서비스 하나쯤은 있지 않나?” 반쯤 투덜대며 검색을 했고, 그렇게 어떤 서비스를 하나 찾아냈다.

이건 뭐지? 복잡한 카드사, 은행, 결제대행사 세팅도 필요 없고 그냥 사업자 등록하고 버튼 하나 누르니까 세무서에 이미 신고돼 있던 각종 부가세 자료들이 쑥 들어왔다. 매입 자료도 거의 다 있었고, 딱 하나 빠진 게 내 신용카드였다. ‘아… 엑셀 각이네’ 각오하고 현대카드, 삼성카드 자료를 업로드했더니… 끝? 끝이라고?

순간 진심으로 중얼거렸다. “오오오 AI님… 저를 가지세요…” 😭

오늘이 하필 부가세 신고 마지막 날이었다. 오전에는 아내 차 타이어 문제로 정신없었고, 오후에는 아이가 갑자기 열이 나서 병원까지 다녀왔다. 일은 밀리고, 머릿속에서는 ‘오늘 밤샘 각이구나’ 하고 각오를 하고 사무실에 들어왔는데, 이 세무 관련 AI님의 은총 덕분에 12시도 넘기지 않고 퇴근할 수 있게 됐다.

집에 가는 길에 딱 하나의 생각이 떠올랐다. “세무사들… 이제 큰일 난 거 아닌가?”

현대차 노조 얘기처럼, 어느 날 갑자기 세상이 훅 바뀌는 순간이 이런 건가 싶었다. 그리고 곧이어 드는 생각 하나 더. “이러다 나도?”

웃기면서도, 솔직히 조금 무서웠다. 편해졌다는 감탄 뒤에는 늘 같은 질문이 따라온다. 이 변화는 누구를 살리고, 누구를 밀어낼까. 오늘은 분명히 내 편이었지만, 내일도 그럴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래도 일단 오늘은… 부가세 신고 끝. 이건 인정이다.

AI 시대를 살아가는 아빠의 단상

나도 나름대로 AI 시대의 변화에 맞춰 생존 방법을 고민하고 있다. 이건 단순히 내 사업을 위한 노력만은 아니다. 아이들이 앞으로 살아갈 세상에 대한 공부이기도 하다. 기술이 이렇게 빠르게 일상을 바꾸는 시대에, 지금의 선택과 태도가 아이들에게 어떤 풍경을 남기게 될지 자꾸만 생각하게 된다.

얼마 전 뉴스를 보다가 마음이 복잡해졌다. 복수의 회사에 합격해 골라서 갔던 시절로 상징되던 스탠퍼드 졸업생들의 취업 상황이, AI의 영향으로 신규 채용이 줄어들며 취업률이 50%에 겨우 미친다는 내용이었다. 남의 나라 이야기처럼 들리지 않았다. 이 변화는 이미 내 문제였고, 동시에 이제 자라나는 두 딸의 문제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의 변화는 인간과 AI의 대결이라기보다는, AI를 잘 다루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차이에서 벌어지는 격차에 가깝다고 느낀다. 거대한 조직과 개인의 싸움이 아니라, 큰 조직조차 AI의 도움을 받아 더 작고 빠른 단위로 쪼개지는 과정이다. 효율이라는 이름으로, 판단과 실행의 주체가 바뀌고 있는 셈이다.

그래서 더 두 눈을 크게 뜨게 된다. 나 혼자 살아남기 위해서가 아니라, 가족이 함께 조금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무엇을 배우고, 무엇을 내려놓아야 할지 계속 묻고 있다. 이 변화의 한복판에서 도망치기보다는, 이해하려 애쓰는 쪽을 택하고 싶다.

완벽한 답은 아직 없다. 다만 분명한 건, 이 시대를 외면하지 않는 태도만은 필요하다는 것. 나와 가족이 이 변화 속에서 조금이라도 더 행복해질 수 있도록, 오늘도 천천히 공부하고 있다.

Heavy Sinks, Light Flies 2편 — AI 슈퍼개인, 속도로 조직을 넘어서는 이유

AI 시대가 되면서 한 가지 현상이 분명해졌다. 더 이상 많은 인원이 모여 일한다고 해서 효율이 높아지지 않는다. 오히려 한 명의 개인이 적절한 도구와 판단 체계를 갖추었을 때 훨씬 빠르고 유연하게 움직인다. 그 개인을 나는 ‘AI 슈퍼개인’이라 부르고 싶다. 단순히 AI를 잘 다루는 사람이 아니라, AI를 자신의 일 구조 안으로 통합한 사람, 즉 ‘AI와 함께 일하는 법’을 몸으로 터득한 사람이다.

혼자 일하는데 팀보다 빠른 이유

과거에는 일을 잘하려면 인력을 늘려야 했다. 기획자, 디자이너, 마케터, 회계 담당까지 각자의 역할이 필요했다. 하지만 AI는 이 역할의 경계를 빠르게 흐리고 있다. AI 슈퍼개인은 회의 대신 프롬프트를 쓴다. 아이디어 회의에 한 시간 쓸 일을 10분 만에 GPT에게 묻고 정리한다. 디자인을 외주 주던 일을 이미지 생성 도구로 직접 테스트한다. 보고서를 쓰기 위해 데이터를 찾는 대신 AI 요약 도구로 핵심만 뽑는다. 기획 → 생산 → 검증의 전 과정을 혼자 처리할 수 있으니 조직보다 느릴 이유가 없다. 중간 승인 단계나 보고 절차가 사라지면, 일의 속도는 자연스럽게 폭발적으로 오른다.

판단의 중심이 바뀌는 순간

AI 슈퍼개인이 빠른 이유는 도구 때문이 아니다. 판단의 단위가 개인에게 귀속되기 때문이다. 조직은 판단이 올라가야 움직인다. 하지만 개인은 판단이 끝나는 즉시 실행으로 넘어간다. 이 차이는 작게 보이지만, 누적되면 엄청난 격차를 만든다. 예를 들어 한 명의 개인이 AI를 활용해 제품을 기획하고, 콘텐츠를 제작하고, 마케팅을 진행할 수 있다면 그는 이미 ‘작은 기업’이다. 그런데도 회의도, 보고도 없다. 결정과 실행 사이의 지연이 사라진다. AI 슈퍼개인은 그 지연의 부재에서 탄생한다.

도구보다 중요한 건 ‘구조’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건 “어떤 도구를 쓰느냐”가 아니다. AI 슈퍼개인을 만드는 건 도구가 아니라 구조다. 즉, 스스로의 일을 구조화하고 판단의 순서를 명확히 하는 사람만이 AI를 제대로 다룬다. AI는 방향을 제시해주지 않는다. 어디로 갈지 모르는 사람에게는 오히려 더 많은 혼란을 준다. AI 슈퍼개인은 목표를 먼저 정하고,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AI를 배치한다. AI가 일을 대신하는 게 아니라, AI가 자신의 사고를 확장하는 구조로 작동하게 만든다. 그래서 AI 슈퍼개인은 본질적으로 효율적인 존재다. 도구를 많이 쓰기 때문이 아니라, 도구를 쓸 타이밍과 맥락을 명확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방향을 잃지 않는 속도

AI 슈퍼개인은 빠르다. 하지만 그 속도는 무작정 빠름이 아니다. AI가 주는 속도를 자신의 기준과 방향 안에 담아낼 때 비로소 ‘속도는 의미’가 된다. 이제 속도는 조직의 특권이 아니라 개인의 기본기가 되었다. AI 슈퍼개인은 방향과 판단을 자신에게 묶고, 속도를 AI에게 위임한다. 그 결과, 조직보다 빠르고 정확하게 시장의 변화를 읽는다.

결국 AI 슈퍼개인은 ‘기술을 잘 쓰는 사람’이 아니라 ‘판단의 구조를 AI와 나누는 사람’이다. 조직이 여전히 회의 중일 때, 그는 이미 실행을 마친다. 이 시대의 승부는 인력의 크기가 아니라 판단의 밀도와 속도에 달려 있다. AI 슈퍼개인이 조직을 이기는 이유는 단순하다. 그는 더 많이 일하지 않고, 더 빨리 배운다. 그리고 더 적은 회의로 더 명확하게 결정한다. 그게 지금 시대의 새로운 생산성 공식이다.

Heavy Sinks, Light Flies 1편 — AI 시대, 레거시 조직은 왜 느려지는가

AI 시대를 살면서, 요즘 가장 많이 드는 생각은 ‘일의 주체가 바뀌고 있다’는 점이다. 예전에는 조직이 중심이었지만, 이제는 기술을 활용해 스스로 판단하고 실행하는 개인들이 세상의 흐름을 바꾸고 있다.

이 연재는 그런 변화의 한가운데를 다룬다. AI 기술의 확산 속에서 ‘일하는 방식’이 어떻게 달라지고 있는지, 그리고 AI 슈퍼개인레거시 조직이 어떤 방향으로 갈라지고 있는지를 살펴본다.

단순히 기술 이야기가 아니라, 나 자신이 어떻게 일하고 사고해야 하는지에 대한 기록이기도 하다. 개인적으로도 이 변화는 앞으로의 일을 결정짓는 중요한 전환점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이 흐름을 한 번 정리해 두고 싶었다.


한때 ‘크다’는 것은 곧 ‘안정적이다’의 다른 말이었다. 사람 수가 많을수록 더 많은 일을 처리할 수 있었고, 규모가 곧 신뢰였다. 하지만 지금은 정반대다. 크면 클수록 느려지고, 느려질수록 판단이 늦어진다. AI가 즉각적으로 판단하고 실행하는 시대에, 레거시 조직의 무게는 더 이상 안정이 아니라 마찰로 작용하고 있다.

문제는 이 무거움이 ‘사람의 무능’에서 오는 게 아니라, ‘구조의 관성’에 있다는 점이다. 레거시 조직은 여전히 위계와 보고, 승인이라는 절차 위에 서 있다. 하지만 AI가 실시간으로 데이터를 처리하고 의사결정을 보조하는 지금, 그 절차는 안정망이 아니라 지연 장치가 되었다. AI가 초 단위로 판단하는 세상에서, 인간이 회의를 통해 하루를 쓰는 구조는 이미 낡았다.

AI가 가져온 가장 큰 변화는 ‘판단 속도’의 단축이다. 누가 더 많은 일을 하는가보다, 누가 더 빠르게 판단하는가가 경쟁력을 결정한다. 과거에는 정보의 접근이 권력이었다면, 지금은 판단의 정확도와 실행의 타이밍이 권력이다. 그런데 레거시 조직의 문제는 이 판단이 분산되어 있다는 데 있다. 위로는 승인, 옆으로는 조율, 아래로는 보고가 이어지며 결정의 순간은 점점 늦어진다. 그 사이, 시장은 이미 다른 쪽으로 흘러가 있다.

반면 AI를 활용하는 개인, 즉 ‘AI 슈퍼개인’은 판단의 단계를 압축한다. 데이터를 수집하고, 정리하고, 요약하고, 실행까지 이어지는 과정을 혼자서 끝낼 수 있다. 과거라면 부서 단위의 협업이 필요했던 일들이 이제는 개인의 도구 조합으로 완결된다. 더 이상 사람 수가 성과를 보장하지 않는다. 판단의 밀도, 즉 ‘한 명이 얼마나 깊고 빠르게 결정할 수 있는가’가 새 기준이 되었다.

이 차이는 시간이 지날수록 벌어진다. 레거시 조직은 위계를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조직을 위한 일’을 만든다. 보고서, 회의, 평가, 인사. 일의 본질은 고객과 시장에 있지만, 실제 에너지는 내부 운영에 쏠린다. 반면 슈퍼개인은 오직 ‘결과’만 본다. 시장의 피드백이 곧 평가이고, 성과는 곧 생존이다. 그래서 AI 슈퍼개인은 시스템을 유지하지 않는다. 필요한 만큼 연결하고, 불필요하면 바로 덜어낸다.

결국, AI 시대의 경쟁력은 관리가 아니라 판단이다. 구조가 클수록 관리가 필요하고, 관리가 늘수록 판단은 느려진다. 반면 개인은 작을수록 빠르고, 빠를수록 정확해진다. 이 단순한 구조적 진실이 지금 세상의 질서를 바꾸고 있다.

과거의 안전은 ‘함께 묶여 있는 것’에서 왔지만, 이제의 안전은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힘’에서 온다. 레거시 조직이 점점 무거워지는 이유는 기술이 변해서가 아니라, 여전히 옛날의 안전을 붙잡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시대는 ‘덩치가 큰 조직’이 아니라 ‘판단이 빠른 개인’을 중심으로 재편되고 있다. AI가 바꾼 건 기술이 아니라 구조, 그리고 일의 주체다.

감자탕로그 1편. 왜 하얀 감자탕이었을까

내가 알던 빨간 감자탕

내가 알던 감자탕은 늘 빨간 국물이었다. 친구들과 술 한잔할 때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메뉴였고, 칼칼한 국물에 뼈가 하나둘 쌓여가는 풍경이 감자탕의 매력이었다. 뼈에서 살을 발라 먹는 손맛, 마지막 남은 국물에 밥을 볶아 먹는 마무리까지.

감자탕은 맛있는 음식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사람들과 어울리는 음식이었다. 소주잔을 함께 기울이며 시간을 보내기 좋은, 어른들의 음식이라는 인식이 강했다. 그래서 감자탕을 떠올릴 때마다 질문은 늘 같았다. 더 얼큰하게 만들 수는 없을까? 입에 더 감기는 맛은 없을까? 감자탕을 만든다는 생각조차 없던 시절이었지만, 감자탕의 기본은 ‘칼칼하고 중독적인 맛’이라고 믿었다.

오너셰프에서 딸 가진 아빠로

그 생각이 바뀌기 시작한 건 코로나가 막 시작되던 시기였다. 결혼 10년 만에 첫 딸을 얻었고, 어렵게 얻은 아이를 자연 가까운 곳에서 키우고 싶다는 마음이 커졌다. 오너셰프로 일하던 오산의 레스토랑을 정리하고, 처가가 있는 강릉으로 이사했다. 강릉에서의 삶은 생각보다 빨리 내 일상의 질문을 바꿔놓았다.

어느 날 장모님이 하얀 감자탕을 만들어주셨다. 그 국물은 내가 알던 감자탕과는 전혀 다른 음식이었다. 장모님이 40년 전부터 해오던 방식 그대로, 신선한 강릉 돼지 사골과 목뼈를 받아 아이들이 먹을 수 있도록 푹 끓여낸 국물이었다.

마침 아이의 이유식 시기와 겹쳐 그 국물에 뼈고기를 잘게 찢어 먹였는데, 아이가 너무 잘 먹었다. 그 모습을 보며 질문이 달라졌다. 더 맛있게 만들 수 있을까가 아니라 누가 먹을 수 있는 음식일까. 셰프로서의 질문이, 아빠로서의 질문으로 바뀌었다.

강릉하얀감자탕이 특별해진 이유

그 질문은 곧 선택으로 이어졌다. 계획했던 식당 대신, 이 음식을 제대로 만들어 온라인으로 팔아보자는 생각이었다. 강릉이라는 환경은 그 선택을 뒷받침하기에 충분했다.

바다와 산이 함께 있고 공해가 적은 덕분에 좋은 재료를 직접 구할 수 있었다. 태백 산골에서 배추를 얻고, 정선에서 고추를 받아 방앗간에서 고춧가루를 빻았다. 강릉에서 돼지 잡는 날에 맞춰 사골을 받고, 강원 한우와 함께 식으면 묵이 되는 사골을 푹 끓였다.

그렇게 대관령을 오르내리며 몇 달을 고생한 끝에 하얀 국물 감자탕이 완성됐다. 아이를 위한 국물에 어른도 즐길 수 있도록 장모님의 다데기를 함께 넣어보내자 반응이 달라졌다. “온 가족이 함께 먹을 수 있어 좋다”, “재료의 신선함이 다르다”는 평가가 이어졌다. 첫 출하 때 새벽 가게에 혼자 앉아 주문 알림을 보며 벅찼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몇 달 동안은 몇 주씩 기다려야 먹을 수 있는 음식이 되었다.

마무리하며

하얀 감자탕은 트렌드를 따라 만든 음식이 아니다. 빨간 국물이 당연하다고 믿던 내가, 아이를 키우며 질문을 바꿨고, 그 질문에 답하려다 보니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결과다.

왜 하얀 감자탕이었을까? 답은 단순했다. 누구나, 특히 아이부터 어른까지 함께 먹을 수 있는 음식을 만들고 싶었다는 것. 그 기준은 이후 강릉하얀감자탕의 모든 판단의 출발점이 되었다.

그리고 이 이야기의 시작에는 언제나 장모님이 끓이던 하얀 국물이 있었다. 그 국물은 왜 그렇게 시작되었을까. 그 이야기는 다음 기록에서 조금 더 꺼내보려 한다.

일이 많아 보일 때, 방향을 먼저 본다

아침 운동을 마치고 To Do 리스트 앱을 열었다. 마음 복잡할 때에는 안과 밖을 청소하는 게 최고지, 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동안 일이 쌓이는 경우가 줄어들어 마음이 가벼웠는데, 오랜만에 ‘프로젝트’ 폴더를 열어보니 카테고리만 10개, 그 아래에 프로젝트가 30개가 넘었다. 순간 멈칫했다. ‘앗, 내 집중력이라는 자원이 여기서도 새고 있었구나.’가만히 생각해보면, 나에게 해야 할 일이 많아 보이는 경우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업무의 갈피를 잡지 못했을 때, 그리고 다른 하나는 일의 방향이 잡혔을 때다. 두 경우 모두 공통적으로 일이 많아 보인다는 점에서는 비슷하지만, 그 속성은 완전히 다르다.

방향을 잡지 못한 경우에는 해야 할 일의 숫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이것도 해야 할 것 같고’, ‘저것도 중요한 것 같고’ 하면서 일의 카테고리가 끝없이 분화된다. 하지만 정작 어디서부터 손대야 할지 알 수 없다. 반대로, 방향이 명확해진 경우에는 해야 할 일의 수가 줄어든다. 업무가 가지치기 되지 않고, 꼭 필요한 일들만 남는다. 프로젝트의 골격이 잡히면 일의 흐름도 자연스럽게 정리되기 때문이다.

이 차이는 단순히 양의 문제가 아니다. 방향이 확실해질수록 단위 업무의 깊이와 밀도가 높아진다. 결과적으로 같은 시간을 들여도 훨씬 만족스러운 결과물이 나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겉으로 보기엔 일의 양이 줄어든 것 같지만, 실제로는 ‘생각의 방향’이 한 점으로 모이면서 에너지가 한곳에 집중된다.

그래서 오늘은 작은 실험을 해봤다. GTD(Getting Things Done) 방식의 기본 원칙을 응용해 2분 안에 해결 가능한 업무를 즉시 처리하고, 시의성과 중요성이 떨어지는 항목은 과감히 삭제했다. 오래된 창고를 정리하듯, 프로젝트 폴더를 하나씩 닫아가며 마음속의 먼지를 털어냈다.

결과는 의외로 시원했다. 무언가를 더한 게 아니라 덜어냈을 뿐인데, 머릿속이 훨씬 또렷해졌다. 해야 할 일의 ‘갯수’가 아니라 ‘방향’을 관리해야 한다는 걸 다시금 깨달았다. 일은 많아도 괜찮다. 단, 그 일들이 같은 방향을 보고 있을 때만 말이다.

뭐든 그냥 늘어놔도 사는덴 지장없어 보이지만 청소하면 상쾌해지고 가벼워지는 경험이 또 쌓였다. 오늘도 화이팅!